반도인들의 조상은 대륙에서 흉악범죄를 저질렀거나 패배하여 반도로 도망쳤는데 이후 어찌어찌하다 조선시대 500년간 가혹한 노비 생활을 하게 되었다. 가혹한 노비의 역사에 의해 대다수 반도인들에게는 후성유전학적인 어떤 성질을 가지게 되었는데 바로 양반들에 의한 끝없는 착취로 인해 허상적인 사고방식을 몸에 익혔고, 자존감이 낮아졌고, 자신의 종자가 우월한 것에 대해 확인하고 싶어 하게 되었고, 영혼의 방향성이 사라지게 되었다. 허상적인 방식을 몸에 익혔다는 것은 그 상황 속에서 인위적으로 일시적 구도를 만들어 타인을 땔감으로 삼아 자신의 잘남을 끝없이 확인하는 것이다. 보통은 시간 속에서 지속적으로 공급받는 뭔가를 축적하거나 쟁취하여 그것을 유산으로 살아가는 것이 정상인류의 방식이지만, 한국인들은 일시적으로 그 공간 속에서 인위적으로 뭔가를 만들어낸 다음 허상적으로 인지하고 자존감을 충족시킨다. 타인을 끝없이 땔감으로 삼아야 되며 착취되는(소비되는) 대상이 끝없이 있어야만 한다. 또 자신의 수치나 부끄러움을 회피할 때에도 스스로 심리적인 트릭들을 만들어내서 허상적으로 인지함으로 회피한다. 영혼의 방향성이 사라졌다 함은 사물이나 현상을 보고 스스로 영혼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반응이 나올 때마다 상대적으로 만들어진 각도에 의해 양반들이 끝없이 공격하다 보니 이제는 사물이나 현상을 보고도 반응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공격할 명분을 주지 않는 형식 안에서 의식적으로(메뉴얼적으로) 반응할 뿐이다. 또 이들은 남들이 정서적으로 이완된 채 뭔가에 반응하거나 문을 열어놓는 것을 보면 “할 수 있을 것 같은 꺼리”로 본능적으로 즉시 판단하고는 남의 영역에 침범하고 침투하고 통제하고 가로채려고 한다. 그렇게 타인을 일회용으로 소비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한국인들을 겪는 정상인간은 한국인처럼 되어버린다. 500년 동안 가혹한 노비 생활을 해오던 자들의 후손들은 남을 땔감으로 삼으려는 본능이 있다. 그러나 리스크를 몹시 염려하고 알맹이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본능 또한 있기에, 쥐새끼 같은 방식을 사용한다. 사람들끼리 어울리거나 상황이 발생해서 그에 따라 반응하거나 뭔가를 정해야 되거나 할 때 그때 당시의 텐션, 서로가 의존적으로 택한 캐릭터상, 실세의 유무, 서로의 기가 어느 정도 되는지, 상대의 명분 유무, 상대의 성격 등을 아주 쥐새끼처럼 무의식적으로 즉시 연산하고는 조심스럽게 상대방이 알듯 말듯, 꼬투리 잡히지 않고 명분을 주지 않는 각도 속에서 정서적으로 상대 우위에 있으려고 언행을 한다. 태생이 쥐새끼들인지라 눈에 띄게끔 공개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 상황, 자신의 캐릭터, 그 텐션 속에서 정색하며 반응하면 쪼잔한 놈이 되어버리고 상대에게 싸움을 거는 놈이 되어버린다. 한국인 대다수는 의존적으로 어떤 체제를 정하고 관성 속에서 사는 습성이 있다. 왜냐하면 이런 성향처럼 보이는 행위를 하다 저런 성향처럼 보이는 행위를 하는 게 한국인에게는 피곤한 부담이기 때문이다. 또 상황이 발생하거나 무언가를 정하고 판단할 때에도 그 미묘한 층위에서 기를 내세워 자연스러운 척하며 차지하려고 하고 악착같이 달려든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당당함을 내세우지만 사실 쥐새끼처럼 계산하고 하는 행동들이며 저열한 욕망이 행간 속에 숨겨져 있다. 다양한 인종들이 나오는 방송이나 유튜브 등을 보면 한국인이 언제나 가운데에 포지션 되어있는 경우가 많다. 또 한국인이 토크를 주도하거나 질문하는 식으로 텐션을 이끄는 경우도 많다. 외국인 입장에서는 그런 아웅다웅이 눈에 다 보이지만 모르는척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능이 낮을수록 본인이 부담할 수 있는 경쟁의 수준도 낮아지는데 그런 종류의 상황, 공간 속에서의 일시적인 무언가를 위해 유치하게 암투하는 것은 인간적인 무언가를 포기하는 행위이며 수치스러운 행위라는 것을 정상인류들은 알기 때문에 속으로는 알면서도 가만히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간적인 무언가가 없는 존재들이기에 한국인들은 그게 쉽게 된다. 한국인들은 본인들이 영리하다고 착각한다. 입체적으로 여러 요소들을 계산해가며 원하는 것을 공짜로 얻어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영리하기 때문에 그럴만한 자격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신과 지성이 정상적인 사람들은 한국인처럼 행동을 하지 않는다. 한국인 특유의 공개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상대만 알게끔, 명분을 주지 않으면서 말려버리는 식으로 착취하는 수법은 대상과 동등한 위치에 있을 때 주로 나타난다. 쥐새끼 같은 일상의 정치공작을 할 필요가 없는 경우에는 형식을 근거로 한다. 예를들어 충고나 조언 등의 이유로 대상을 가르치고, 대상이 룰을 어겼다고 지적하고, 행동을 고치게 하고, 형식을 통해 대상이 만든 무형적인 유산이나 기회를 쉽게 가로채고 도둑질하고 차지하면서 상대를 통제하는 허상적인 만족감을 누리는 것이다. 타인을 괴롭히거나 움직이는 사물을 괴롭히는 심리는 착취적인 심리에 의해서이다. 괴롭힘의 쾌락적인 측면도 있지만 자신이 뭔가를 가하고 있고 상대는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허상적인 통제 욕구를 충족시키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한국인들이 사과를 잘 안 하는 것은 자존심이 쎄서가 아니라 원시적으로 뭔가에 의해 자신이 움직여졌다는 것을 인지하고는 무의식적인 거부반응이 나오기 때문이다. 자신에 의해 상대가 상처받고 피해 입은 것이나 양심의 가책보다 말초적이고 원시적인 구도에 의해 인지된 것을 회피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국제관계에서는 한국적인 특성이 더 명확하게 나타난다. 한국은 일본에게 있는 대로 막 저지른다. 어떻게든 반일을 정당화하고 일본에게 사과를 요구한다. 이때 쓰는 수법은 한국의 자의적인 반일 해석 체계를 만든 다음 그것을 근거로 일본의 행동을 제어하는 것이다. 도덕을 근거로, 피해자라는 입장을 근거로, 당위성을 근거로 일본의 행동을 통제한다. 그러면 그 과정에서 일본이 한국의 말을 들어주고, 한국에게 사과하고, 일본 교과서 수정이나 참배나 몇몇 행동을 멈추게 되면 ‘자신에 의해 상대가 통제되었다’라는 원시적인 구도에 의해 서열적 만족감을 느낀다. 사죄와 배상 자체가 목적이었다면 정산하고 이후부터 서로 독립적으로 갈 길 갔을 것이다. 한국의 ‘사죄와 배상’이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고, 상대를 요리하기 위한 일종의 형식이기에 진정한 사과가 아니라느니 하면서 계속해서 다그치는 것이다. 허상적이고 일시적으로 자존감을 충족시켰기에 계속해서 그때 상황 공간마다 뭔가가 필요하다. 또 여전히 상대가 고갈되지 않았고 상대가 자기 위에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계속해서 정치적인 목적을 숨기며 접근하는 것이다. 그러면 일본은 도가 지나친 구속과 간섭을 피하기 위해, 한국과 충돌되는 역사 해석을 알려주기 위해 토론을 하는데 한국의 논리와 토론이란 종교학에 대해 배운 신흥 사이비 전도사의 그것과 같아서 필연적으로 끝이 없는 소모전이 펼쳐지게 된다. 한국인은 반일교육에 대해 의문이 없으며 거짓말과 역사왜곡에 속고 있는 자각이 없다. 그래서 반일은 매트릭스라는 것이다. 하나에 대해 설명해 주려면 그것의 기반이 되는 열가지 지식을 알려줘야 되고, 사물을 보는 관점과 각도를 알려줘야 되고, 다른 연관된 현상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야 되고, 열 가지 지식을 알려주면 그와 관련된 백가지 지식들과 다른 연관된 사물에 대한 지식들을 알려줘야 된다. 그러나 모든 작업을 해도 위에 적었듯이 정신구조가 기본적으로 방향이 없는 상태라서 아메바처럼 잊어버린다. 엄청난 노력을 쏟아부어야 납득시키는데 반대편 자극이 더 센 것이 오면 그에 따라 반응하기 때문에 노력이 허사가 된다. 게다가 한국이 그 숨겨진 추악한 욕구에 비례하는 악다구니를 써가며 교리적으로 방어할 때마다 피곤한 방식으로 또 그것을 잡아줘야 된다. 일본이 정론으로 한국에 반박하고 일본의 주권을 관철하고 수호하면 본전을 치는 것이 되며, 인간으로서의 긍지를 잃게 된다. 말하자면 껍데기를 지키기 위해 알맹이를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정상인류라면 알맹이를 지키기 위해 껍데기를 양보할 수밖에 없다. 딜레마인 것이다. 접촉을 안 할 수도 없는 것이 한국과의 접촉은 시작을 하게 되면 끝을 봐야만 껍데기를 유지하고 알맹이를 잃는 일종의 ‘껍데기 본전 치기’가 되는 소모전이 전개되기 때문에 아예 처음부터 시작조차 하지 말아야 하지만 미국에 의해 묶여있는 상황상 무시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한국이 일방적으로 반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은 일방적으로 내뱉고 저질러도 아무 손해를 안 보는데 일본은 방어해도 손해고 무시해도 손해인 관계이다. 피드백은 수치심, 자괴감, 부끄러움인데 한국은 양심이 없다. 고통을 회피하고 한국인처럼 되느냐, 인간적인 것을 지키며 착취당하느냐 양자택일을 요구받게 된다. 소비된 대상은 영혼을 잃게 된다. 끝없는 착취로 인한 상처의 분량이 마음 문을 닫게 만든다. 사고나 생각이 딱딱해지고 표면적인 것만 보게 되고 동향이 사라진다. 영혼이 사라진다. 그러면 한국인들은 다른 착취할 대상을 찾아 욕구를 충족시킨다. 일본이 아직 중간단계에 있으니 계속해서 착취하려고 하는 것이다. 한국인들과 같이 지내는 사람들은 거짓말에 속고 껍데기만 남았거나 아니면 진행 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