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그림자들이다

그림자는 외물에 의해 일시적이고 피동적이고 정적으로 존재하며 실체가 없는데 한국인의 모든 특성이 이에 해당하는것 같다. 한국인은 자존심, 국가정체성, 자아, 자신의 잘남 유무, 삶의 방향 등 모든게 외물과 관련되어 있다. 나 자신이 있고 외물들이 있는게 아니라 모든 것이 나 자신과 연관되어 있다는 뜻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외물에 의해 부수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한국인들이 남 위에 있거나 남을 이기려는 자존심이 비정상적으로 강한것도 승부근성이니 전투민족이니 하는 이유때문이 아니라 태생이 그림자들이기 때문이다. 자존심 욕구가 조상의 노비 트라우마 히스테리 분량만큼 어마어마하게 큰데 영혼이 없으니 그림자적인 방식으로 열등감의 욕구를 충족시키는것이다. 한국인의 인상, 삶, 습성, 언행은 정태가 없고 동태뿐이다. 정적인 특성 또한 그림자의 특성이다. 한국인 인상을 보면 원시적이고 말초적인 자극을 충족시키기만 할뿐이다. 한국의 국가정체성과 독립의 의미 또한 피동적이다. 일본이라는 외부 사물이 있어야 관계를 통해 반일을 정당화하고 피동적으로 국가정체성이 생겨난다. 독립 또한 자신이 스스로 일어서는게 주가되고 무언가로부터 벗어나는것은 부수적인 현상이 되어야 하는데 무언가로부터 벗어나는것에 의해 독립된, 일종의 피동적인 사고관으로 자신들의 독립을 정의한다. 한국은 동전 아랫면의 추악한 본심을 감추기 위해 도덕의 이름으로 만든 동전 윗면의 반일이라는 공허한 수단을 통해 일본의 이미지를 왜곡하고 집요하게 한국과 관계시켜 도덕적인 서열 위에 있으려고 한다. 끝없는 질척거림의 행위들로 허상적이기는하나 대상을 만들어진 서열 아래에 넣고 통제력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만들어진 허상의 서열은 공간속 상호작용을 통해 유지해야하며 이로 인해 상대는 피로해진다. 일상의 파워하라가 지나치게 많은것도 문화적 현상이라기보다는 그것이 그림자형 기생충들의 생존방식이기 때문이다. 감시와 통제 영역, 타인의 “기”, 피지컬, 성격, 가지고있는 카드패, 인맥 등을 쥐새끼처럼 계산해 할수 있을것 같다고 여겨지면 동전 윗면의 형식을 통해 남을 소비하거나 지배하거나 사용하거나 침입한다. 한국인들은 외부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그림자처럼 자신의 잘남을 확인받고 충족시키기에 잘나지려면 땔감이 있어야 한다. 영혼이 없어서 시간속에서 뭔가 유산을 만들고 항구적으로 공급받는게 아니라 공간속에서 남을 땔감으로 소비해 일시적으로 충족시킨다. 한국인이 거짓말을 쉼없이하고 위장을 본능처럼 하는 것도 영혼이 없기 때문이다. 인상부터 페르소나까지 만들어진것이다. 표현이 없고 오로지 흉내뿐이다. 한국인의 모든 삶에는 만들어진것들뿐이다. 그림자가 존속하려면 계속 외물에게 빛을 작용해야되듯이 한국인들 또한 공간속에서 외부에 의한 작용으로 자신을 유지한다. 한국인이 눈치가 심하고 유행에 민감한것은 교육부재가 아니라 태생이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그림자는 실체가 없고, 외부 관계에 의해 만들어지고, 정적이고, 일시적이고, 외물에 의해 모양지어지지만 한가지 특징이 더 있다. 바로 자극이 더 센쪽으로 간다는것이다. 한국인의 언행을 산출하는 함수식에 의해, 그때만의 감정과 행동이 나온다.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고나서 주변 요소들에 의해 함수 산출값이 다르게 나온다. 왜냐하면 삶의 모든것이 외물에 의해 피동적으로 결정되는 인간들이라 본인이 지식으로 알고있어도 그것은 여러 상대적인중 하나일뿐이지 절대적인 하나가 아니다. 그래서 저울상 무게가 안무거우면 알아도 그저 알기만 할 뿐이다. 한국인에게 도덕에 절대성이 부여될때는 명분이나 위장을 위할때뿐이다. 진실을 말하고 정론을 말해도 꿈을 꾸고 있는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전체주의 군중심리로 반일을 외치고 노재팬때 굳게 다짐하다가 동물의 숲 플레이스테이션5 열풍때 구매한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한국인의 냄비근성은 문화적인 특성이 아니라 인종적인 특성이다. 한국인의 행동을 산출하는 함수식에는 영혼에 해당하는 변수가 없고 오로지 외부 조건들뿐이다. 그래서 그림자라는것이다. 일반적인 사고방식은 시간속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선형적인 역사성을 띄는 것이기에 그 기준이 있고 변형이 없는 편이지만 기준은 내부에 있어서 지적인 유동성 또한 갖추고 있고 변화도 자연스러운데, 정신적으로 유연하지 못한 한국인의 사고방식은 외부환경에 따라 자극이 강한쪽으로 반응하는 공간적 주변적(관계적) 사고체계를 가졌고 기준이 외부에 있어서 지적인 유동성 없이 언제나 같은 획일적인 반응을 가진다는 것이다. 한국인은 아메바처럼 공간속 임시적 반응만 하는 그림자형 인간이다. 그림자형 한국인이 착해질때는 불리할때 착해지는것이 최선인 경우뿐이다. 선악에 대해 알아도 지식으로만 알뿐, 절대적인 하나가 아니라 여러 상대적인것들중 하나라서 저울의 무게가 무거워질때만 택한다. 한국인이 솔직해질때는 위장을 유지하는것보다 솔직해지는것이 더 저울상 무게가 무거울때이다. 한국인이 본색을 드러낼때는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고 여겨질때이다. 한국인들의 실체가 밝혀질때는 외부로부터 학습한 도덕적 이미지에 대한 욕구에 의해 유지중인 의식적 메뉴얼의 무게보다 반대편의 비정형적으로 오는 자극이 강할때이다. 예측 못한 패턴밖 상황속에서 메뉴얼보다 반대편 자극이 강하면 본성이 드러난다. 한국인의 동인은 외부에 있으며, 한국인 내부에 있는 동인도 세뇌로 학습된 것들뿐이다. 타인에게 소속된 한국의 이미지를 신경 쓰라며 획일적으로 한국인의 정체성과 한국에 소속감을 가지도록 사명과 당위를 강제로 부여하거나, 한국인이면 한국에 애국하고 한국인답게 행동하라며 한국인 다움을 강요하거나, 우리라는 표현을 당연히 쓰는 것이나, 비판자를 볼 때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인 위치 관계 속 위치를 보는 것 등등… 그림자형 인간들은 피동적으로 형성되는 인간들이라 관계중심주의가 기본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나라 사람들의 관계중심주의랑은 다르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심성적으로 게으르거나 효율성 등에 의해 그런 성향을 가지게 되는것이지만 한국인들의 관계중심주의는 그림자적인 태생에 의한 현상이다. 말하자면 한국인들의 관계중심주의는 원인이 아니라 부수적 현상이다. 한국인들에게 발생하는 일은, 공간속에서의 일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커다란 컨텍스트 안에서 발생하는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속 연관성이 있기도 하는 점이자 선이 아니라, 일시적이고 독립적인 점 하나일 뿐이다. 공간과 시간속에 사는 인간이 만든 하나의 사건에는 공간과 시간(점과 선)의 속성이 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외부에 의해서 사는 그림자들이라 공간뿐이라는것이다. 그래서 분열되어있고 모순투성이며 상황 속의 함수값에 의해 판단할 뿐이다. 예를들어 반일을 하면서 왜 일본여행 다니냐고 하면, 메타인지가 낮고 다른 원리에 의해 매트릭스를 살고 있는 공허한 한국인들은 문화와 정치는 다르다느니 일본정부와 일본국민은 다르다느니 하는것이다. 의문과 조사가 없는 한국인들은 한국에서 반일교육을 세뇌되어 일본을 악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림자 인간들에게는 모든 것이 수단이고 도구이다. 절대적인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 인간인척하는 것은 인간 인터페이스를 취해 자신을 위장하거나 동전 아랫면의 무언가를 추구하기 위함이다. 일시적이고, 공간뿐이고, 자신이 믿는 것이 정답이라고 믿고, 외부에 의해 국가정체성이 존립하며, 동인이 외부에 있고, 언제든지 모양이 바뀌고, 자극이 강한 쪽을 향해 움직인다. 그것이 수단밖에 안된다는 점은 한국인들이 양심이 없고 공허한 유사인간이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그림자형 인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