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은 전화 한 통에서 시작했다. 나는 그날도 회사에서 야근을 하고 돌아와 침대에 쓰러져 있었다. 1주일째 야근이었다. 시계를 흘긋 보니 밤 10시. 저녁은커녕, 씻을 기운도 없이 정장 차림 그대로 엎어져 있던 그때였다. 스마트폰 진동이 울렸다. 010-XXXX-XXXX 모르는 번호였다. 보나마나 거래처의 누군가 일테다. 지금 강남의 모 술집으로 와서 술값을 내고 가라는 전화겠지. 전화를 받으면 나는 비굴하게 법인카드를 챙겨 술집으로 튀어가 술값을 긁고, 그들이 선심 쓰듯 주는 (사실은 내가 산) 술을 몇잔 받아 마시고, 온갖 요란한 말로 그들의 비위를 맞춰주고, 다시 집에 오고, 길어야 세네 시간 정도의 잠을 자고, 다시 새벽별을 보며 출근해야 한다. 작은 제약회사의 영업사원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이렇게 하는 것이다. 모두들 이렇게 돈을 벌고 있다. 그렇게 밖에 나를 위로할 수 없었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 나날이었지만, 어쩌겠는가? 인간이라면, 밥먹고 똥싸고 잠을 자야하는 인간이라면 이렇게라도 해서 빌어 먹어야 살 수 있는 동물이거늘. 머리는 계속 침대에 처박은 채 힘겹게 손을 들어 스마트폰 화면을 터치했다. “네… OO제약 영업2부 김ㅁㅁ 대리입니다.” 왁X껄한 술집 소리를 예상했지만, 생각과 달리 수화기 너머는 조용했다. 침묵이 이어졌다. “여보세..” “아쎄이..” “여보세요?” “목소리가 그게 뭔가 아쎄이.” 은은하게 울리는 저음의 목소리… 머릿 속 한 구석에 오래토록 방치해뒀던 기억의 조각들이 서서히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뜨거웠던 그 시절, 십여 년 전 서해안의 한 작은 부대의 이야기. ===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던 나는 조금만 노력(?)했다면 공익 판정을 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아버지 손에 이끌려 반강제로 해병대에 입대했다. 하지만 해병대의 훈련과 실무는 ‘열심히 하자’ ‘최선을 다하자’ ‘안되면 될 때까지’ 따위의 낭만적인 생각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나는 매일 같이 낙오했고, 매일 같이 빵꾸를 냈다. 그리고 어김 없이 매일 선임 해병들에게 얻어맞을 수밖에 없었다. 전입 이후 처음 한 달은 매일 화장실에서 혼자 숨죽여 흐느꼈다. 그리고 그 이후론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아마 감정이 모조리 박살나 없어진 것이었으리라. 낙오할 때도, 빵꾸를 낼 때도, 선임들에게 맞을 때도 심지어 악기바리를 할 때도 나는 아무 감정이 없었다. 내가 그때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을진 모르겠지만 아마도 “이러다 못 버티면 알아서 죽어지겠지” 정도의 생각으로 하루를 보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야간 경계근무를 서고 돌아와 다시 자리에 누우려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쳤다. 깜짝 놀라 위를 바라보니 처음 보는 선임 해병이 서 있었다. “아쎄이 따라 와라” 어안이 벙벙했던 나는 그 선임을 따라 막사 밖 흡연장으로 갔다. 생활복에 팔각모를 푹 눌러쓴 선임은 나에게 담배 한 개비를 건냈다. 그리곤 우린 말없이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지금 무슨 일인 거지?’ 처음 보는 선임이 한밤중에 불러내 말없이 담배를 피우는 이 상황이 몹시도 황당했다. 담배가 한참을 타들어가던 도중 그 선임이 입을 열었다. ”아쎄이 이름이 뭔가?“ 굉장히 낮게 그리고 울리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무섭기보다는 오히려 가슴 한켠이 따뜻해 지는 저음이었다. ”이병 김ㅁㅁ입니다!“ ”오늘 낮에 너를 처음 보았다. 그런데 눈빛이 왜 그러지?“ ”제 눈빛 말씀이십니까? 낙오와 빵꾸 등 여러 가지로 선임들에게 질책을 받긴 했지만 눈빛 지적은 또 처음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한참을 망설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가나 아쎄이? 네 눈빛은 산 사람의 눈이 아니다 이말이다!” 할말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푹 숙인 나에게 선임이 다시 말했다. “우리 자랑스러운 해병대에 그런 눈빛은 용납할 수 없다. 해병의 혼을 가득 담아도 모자랄 판에 그런 기열 땅개같은 눈빛이라니…” 왜 그랬을까 갑자기 화가 치밀어 솟았다. 이 X 뭐 어쩌란 말인가. 니들이 하라는 훈련 다하고, 니들이 때리는 거 다 얻아맞아주고, 다 했는데 뭐 어쩌란 것인가. 분함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리고 한 마디를 내뱉었다. “저도 죽을 것 같단 말입니다. 이제 그만 좀 괴롭히십시오” 내뱉자마자 가슴이 철렁했다. 엉겹결에 튀어나온 실언, 이제 이 선임이 나를 때려 죽이고 연병장에 파묻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다. 하지만 그 선임은 나를 때리지 않고 한참을 쳐다보며 담배를 마져 태웠다. 나도 뻘쭘하게 서있었다. 그 때, 그 선임이 내 활동복 바지 속에 손을 넣고 포신을 움켜쥐었다. “따뜻하구만…” 그리곤 마치 피아노를 치듯 손가락을 하나하나 차례로 움직여 나의 포신을 톡톡 건드렸다. “나는 안다. 포신 마져 차가운 해병은, 더 이상 해병이 아니라는 것을… 너는 기열 땅개의 눈을 하고 있지만 이 포신만큼은 뜨겁구나…” 나의 포신이 점점 커졌다. 선임은 계속해서 손가락을 놀렸다. 바이엘 상권으로 시작한 손놀림은 체르니100, 모차르트를 거쳐, 이윽고 쇼팽의 에튀드 po.10 no12 ‘혁명’을 치기 시작했다. 나는 참지 못하고 올챙이 크림을 내뿜었다. 선임은 자신의 손에 묻은 올챙이 크림을 잠시 쳐다보더니 입으로 쭉 빨았다. “역시 진하구만” 나는 놀라움과 황당함으로 엉거주춤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선임이 벼락같이 소리쳤다. “좋다 아쎄이 너에게 해병의 혼을 주입시켜주마! 전우애를 준비해라!” 나는 그 모습에 기가 질려 후다닥 바지를 벗고 두 손으로 둔덕을 벌렸다. 벌린 내 다리 사이로 힐끗 보인 선임의 포신은 마치 다른 사람의 종아리 만큼이나 우람했다. 선임의 포신이 항구로 들어왔다. 나룻배? 아니 이건 여객선?? 아니 이건 항공모함이었다. 고통으로 다리에 힘이 플렸다. 내가 넘어지려는 순간 그 선임이 포신에 힘을 주고 나를 그 포신의 힘만으로 올려세웠다. “아쎄이 도망가지 마라! 네 앞에 있는 장벽에 당당히 맞서 싸워라! 그렇게 싸워도 안 된다면 더 싸워라! 그리고 차라리 싸우다 죽어라!” 갑자기 가슴 한켠이 불타오르는 듯했다. 아드레날린과 함께 용기가 솟구쳤다. 나도 내 허리를 다시 곧게 세웠다. 선임의 리드는 점점 빨라졌다. 싸워서 이기고 지면은 죽어라 헤이빠빠리빠 헤이빠빠리빠! 아무도 없는 새벽 흡연장에 살과 살이 부딫치는 진짜 전우애의 소리가 가득 넘쳤다. 따흐흑 따흐윽 부라보! 부라보! 해병대! 그 날 밤 이후 그 선임을 자주 볼 수는 없었다. 다른 선임들에게 그 선임의 이름이 ‘박철곤 해병님’이라는 것과 부대 뒤편에 땅굴을 파고 홀로 지내시다 부대에 위기가 닥쳤을 때만 나타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날을 계기로 나는 차츰 부대에 적응했고, 아주 강하진 않지만 그래도 기열은 아닌 명예로운 해병이 됐다. 그리고 가끔씩 용기가 무너질 때면 부대 뒤 땅굴로 찾아가 박철곤 해병님과 두어시간 전우애를 나눴다. 박철곤 해병님은 그때마다 귀찮다는 기색 하나 없이 나를 받아 주셨다. 그리고 마침내 다가온 전역식날… 버스를 타기 직전, 뒷산 먼 발치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박철곤 해병님이 보였다. 전역모 위로 손을 올리고 누구보다 우렁차게 필승 경례를 올렸다. ==== “필! 승! 박철곤 해병님 이게 얼마만입니까?” 나는 침대에서 바짝 일어나 10여년 만에 다시 경례를 올렸다. “아쎄이! 힘든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때의 눈빛 만큼은 항상 유지를 하거라. 해병의 눈에서 해병혼이 사라진다면 바로 기열, 땅개를 의미하는 것이다!” 눈물이 쏟아졌다. “조금은 힘이 듭니다.” 해병님은 잠깐 침묵하더니, 그 따뜻하고, 낮고, 울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 그러니 네 인생에 자부심을 가져라.” “…” “네가 너무나 힘들 때 다시 연락하마.”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끊겨버린 스마트폰을 부여잡고 한참을 울었다. 다시 그 번호로 전화를 걸어봤으나 없는 번호라는 응답만 들릴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침대에 쓰러졌다. 정말 간만에 푹잤다. 아침에 일어나니 며칠을 잔 것처럼 개운했다. “어이 김 대리 뭐 좋은일 있어? 맨날 죽상이더만 오늘은 얼굴이 활짝 폈네?” 출근길 엘리베이터에 마주친 최 부장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닙니다 부장님 회사오는게 항상 즐겁죠 뭐! 하하하” 그래 이런 비굴함 따위 언제라도 상대해주마! “허허 이 친구 농담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저 앞에 내 책상이 보인다. 내 컴퓨터와 어제 작업을 하다만 온갖 서류들도 보인다. 최 부장이 환기를 위해 자기 자리 뒤 창문을 활짝 열었다.. 환한 햇살이 내 자리로 쏟아졌다. 나는 내 자리에 앉으며 낮게 속삭였다. 부라보 부라보 해병대. 나는 명예로운 해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