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케시마를 왜곡하는 한국의 주장 반박

한국

에도 시대 실학자 하야시 시헤이(林子平)가 1785년 제작한 ‘삼국접양지도’ 에는 ‘타케시마는 조선의 것’이라고 표기돼 있습니다.

 

일본

『삼국접양지도』에서 언급하고 있는 타케시마는 타케시마 잇켄(竹島一件)의 타케시마. 즉, 현재의 울릉도입니다

현재 타케시마의 1785년도의 명칭은 마츠시마(松島)였습니다. 마츠시마를 타케시마라고 칭한 것은 19세기 후반에 처음 나타나며, 1905년에 타케시마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삼국접양지도』에서의 섬 위치나 크기 등을 보아도 현재의 울릉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 

1887년 오카무라 마쓰다로가 편찬한 신찬지지 2권에 수록된 일본총도에는 울릉도와 독도(타케시마)는 ‘조선땅’으로 분명히 표기돼 있습니다.

 

일본

조선땅으로 표기되어있지 않습니다.  

 

한국측이 언급한 1887년 오카무라 마쓰다로가 편찬한 신찬지지 2권에 수록된 일본총도에 타케시마(독도)가 조선땅이라는 표현은 전혀 없습니다.

 

단순히 타케시마(독도)에 채색이 되어 있지 않은 정도입니다. 이는 당시 타케시마가 명확하게 일본의 영토인지 미확인 상태였기에 채색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타케시마가 조선 등 특정국의 것이라고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일본 본토 인근의 수많은 섬에 대해서 모두 명확하게 영유권을 판단한 상황이 아니였으며, 1905년 2월 22일 타케시마를 편입하여, 명확하게 영유권을 확립했습니다. 

 

타케시마(독도)가 한국땅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면, 1905년 2월 22일 이전에 조선측에서 타케시마(독도)를 조선땅으로 편입한 기록을 제시해야 합니다.

 

한국 

대한제국은 고시 41호를 통해 석도를 영토로 선포했습니다.

 

일본

석도는 독도가 아닙니다.

대한제국 고시가 관보에 기재된 것은 1900년의 일입니다. 그리고, 1906년의 심흥택 보고서에서는 본국 ‘독도’라는 표기를 이용했고, 또 같은 시기의 횡성신문의 울릉도 질의에서는 ‘석도’라는 표기를 이용합니다. 독도와 석도라는 명칭은 동시대에 각각 쓰였는 데, 만약 동일한 섬이라면 혼란을 피하기 위해 석도는 독도라는 기록이나 표현이 하나라도 있어야 합니다. 허나, 석도가 독도라는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별개의 섬이라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편입을 위해서는 정확한 경위도를 기록했어야 합니다. 허나, 경위도를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석도는 울릉도의 행정 구획에 편입되었다고 하는 데, 독도는 울릉도의 행정 구획에 편입된 적이 없습니다.

1955년 한국의 외무부 정무국(政務局)이 발간한 『독도문제 개론』(獨島問題概論)이라는 책자가 있습니다. 이 책에 독도에 관해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습니다.

– 울릉도의 행정 구획에 편입된 명시된 공적기록이 없다

 

따라서, 석도는 독도가 아닌 것이 명백합니다.

 
 

한국 

1905년 2월 독도(타케시마)를 일본령으로 편입하는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이는 러일전쟁 중 한반도 침탈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이미 확립된 대한제국의 독도(타케시마) 영유권에 대해 행해진 불법적 무효 조치입니다. 대한제국은 1900년 <대한제국 칙령 41호>로 독도를 관할구역에 포함시키는 행정조치를 확고히 하였습니다.

 

일본

대한제국 칙령 41호에는 ‘독도’라는 단어조차 나타나지 않습니다.

 

한국측이 언급한  대한제국 칙령 41호는 아래와 같습니다.

 

「울릉도를 울도로 이름을 바꾸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한 건 제1조 울릉도를 울도라 개칭하여 강원도에 소속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여 관제중에 편입하고 관등은 5등으로 할 일 제2조 군청위치는 대하동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전도와 죽도, 석도를 관할할 일」

 

죽도 및 석도가 타케시마(독도)라는 근거도 전혀 없으며, 울릉도 옆에는 죽서도, 관음도로 불리는 두 섬이 존재하는 데, 이 섬을 가리킨 것으로 추측될 뿐입니다. 

 

 

한국 

1946년 연합국총사령부는 독도(타케시마)를 한국령으로 확인하였습니다. 한국와 일본 영토를 구분짓게 되는데 울릉도,독도(타케시마),제주도를 일본 영토에서 제외한다고 최고 사령부지령(SCAPIN)제677호에 명기하였습니다. SCAPIN 제677호에 의한 일본 행정관할권의 지리적 범위를 검토하며 독도(타케시마)는 일본 영토에 속하지 않는다고 명확히 하였습니다.

 

일본

 

한국측이 언급한 해당 문서가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동의가 필수적입니다.

허나, 일본은 해당 문서에 동의하지 않았기에 효력을 지니지 않습니다.

 

또한, 최고 사령부지령에는 모두 그 문서 안에서 일본국의 영토귀속이 최종적으로 결정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기하고 있으며, 이후 수정본에서는 타케시마(독도)를 제외한 울릉도,제주도만을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고 나타내었습니다.

 

 

한국 

세종실록”의 “울릉도”, “독도” 기사를 살펴보면 “우산”과 “무릉” 두 섬이 “삼척” 정동방의 바다 가운데 있다.두 섬의 거리는 멀지않아서 날이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 신라 때에는 “우산국”, “울릉도”라고 칭하였다 라는 표기가 존재합니다.

 

일본

한국측이 언급한 세종실록 지리지를 보면 「우산과 무릉의 두 섬은 현(울진현)의 정동쪽에 있다. 두 섬은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며, 날씨가 청명하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신라 시대에는 우산국이라 칭하였다.」라고 우산도에 대해서 나와 있습니다.

 

허나, 우산도는 독도가 아닙니다.

 
한국에서 1899년 출간된 대한전도에서의 우산도는 위도나 경도를 보면, 이 우산도(于山島)는 죽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 

1965년 한일협정으로 일본은 독도(타케시마)를 포기했습니다.

 

일본

1965년 일한협정전문 (일본어판) (한국어판)의 어디에도 타케시마(독도)에 대한 언급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와 별개로 어업협정에도 역시 영유권 문제는 차후 해결하기로 하고, 협정문에서 독도 및 타케시마라는 지명을 표기하지 않는 것으로 협의했을 뿐입니다. 이를 포기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억지에 불과합니다.

 

만약 포기한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타케시마 또는 독도를 표기하지 않는 것에 동의, 서명한 한국 역시 독도(타케시마)를 포기한 것이 됩니다.

 

 

한국

『동국문헌비고』에「울릉, 우산은 모두 우산국의 땅으로, 우산은 즉 왜의 소위 마츠시마에 해당한다.」고 한다.이 우산은 독도에 해당합니다. 당시의 일본은 독도를 마츠시마라고 부르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영토에 해당합니다. 1808년의『만기요람』이나 1908년의『증보문헌비고』에도 같은 내용이 쓰여 있습니다.

 

일본

『동국문헌비고』의 분주는「여지지에 이르기를(輿地志云)」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동국문헌비고』는 출처가 유형원의『동국여지지』(1656년)라고 밝혔습니다. 허나,『동국여지지』에서는「일설에는 우산도와 울릉도가 같은 섬이다(一説于山鬱陵本一島)」라고 되어 있으며, 우산도가 마츠시마(현재 타케시마)라는 문구는 전혀 없습니다. 동국문헌비고에서는 출처에 없는 내용을 허위로 작성한 것입니다. 
또한, 한국에서 1899년 출간된 대한전도에서의 우산도는 위도나 경도를 보면, 이 우산도(于山島)는 죽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 

일본의 『삼국통람도설』에 타케시마(울릉도) 와 그 부속도인 우산도가 그려져 있고, 조선과 같은 색으로 채색되어 조선의 영토임을 명기하고 있습니다.

 

일본

위에서도 언급했듯 우산도는 현재의 죽도입니다. 타케시마(독도)와는 관련이 없으며, 울릉도 및 울릉도의 부속 섬 (관음도, 죽서도 또는 죽도)가 조선땅이라고 인정한 증거입니다.

 

한국 

일본의『일본여지도고』, 『일본국지리측량지도』, 『관판실측일본지도』, 그 외 다른 민간에서 제작된 지도에는, 당시 일본식 명칭이었던 마츠시마가 기재되어있지 않습니다. 기재되어있는 지도도 오키 제도나 돗토리 현과 같은 색이 아닌 무색으로 되어 있습니다. 일본은 마츠시마를 조선의 땅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일본

해당지도는 일본에서 타케시마를 공식적으로 편입한 1905년 이전에 제작된 지도일 뿐더러, 그 섬을 마츠시마라고 표기하지 않았습니다.

해당 섬을 마츠시마라고 주장하는 것에는 아무런 근거도 전혀 없을 뿐더러, 섬의 위치와 형태로 보아 현재의 관음도 또는 죽서도로 판단됩니다. 타케시마는 해당 지도에서 나타나지 않으며, 타케시마는 1905년 2월 22일 정식으로 일본영토에 편입 되었으므로 그 이전 지도에서는 그려지지 않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일입니다.

또한, 일본은 1905년 공식적으로 타케시마(독도) 편입을 조선에 통보하여 의견을 물었으며, 조선은 어떠한 반론도 하지 않았습니다.

 

한국 

도해면허는 자국의 섬에 방문하기 위해서는 필요 없는 문서입니다. 이를 보면 일본이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일본

그건 한국측의 착각입니다.

국외로 나가는 경우에 발급된 것은 주인장(朱印状)이지, 도해면허가 아닙니다.

 

전국시대(戦国時代)부터 에도시대(江戸時代) 초기에 걸쳐 무역 등을 위해 국외로 나가는 경우에 발급된 건 주인장(朱印状;쇼군이나 다이묘의 주인(朱印)이 찍힌 공문서. 주인(朱印)이 찍힌 명령 문서를 말함.)이라는 것입니다. 주인장(朱印状)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에도막부의 쇼군(将軍) 등, 시대의 권력자의 주인(朱印)이 날인되어 있었습니다. 이와 비교해 돗토리번(鳥取藩) 요나고(米子)의 오오야집안(大谷家)과 무라카와집안(村川家)에 발급된 도해면허는 로쥬(老中;에도막부의 쇼군 직속으로 정무를 담당하던 최고 책임자) 등 막각(幕閣; 에도막부의 최고수뇌부)이 연서한 봉서(奉書; 고위자가 의사 및 명령 등을 특정인에게 전달할 때, 가신 등의 하위자에게 한 번 그 내용을 구두 등으로 전해 하위자가 자기 명의로 그 내용을 기록한 문서를 작성해 전달 대상자인 특정인에게 발급하는 형식을 취한 것.고위자가 직접 특정인에게 문서로 발급한 직장(直状)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형식을 취하며, 타케시마(현재 울릉도)에 대한 독점적 「도해」가 허락되었습니다. 1635년 에도막부에 의해 일본인의 해외왕래를 금했어도 오오야와 무라카와 두 집안에 의한 타케시마(현재 울릉도)의 도해는 그 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도해’가 ‘출국’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물며, 당시 언급된 타케시마는 현재의 울릉도를 뜻하기에 현재의 타케시마(독도)와 무관합니다.

 

한국 

일본의 해군성이 1876년에 발행한 「조선동해안도(朝鮮東海岸図)」와 같은 관찬지도도 독도를 한국영토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일본

독도를 한국영토로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해도(海図)는 항해에 필요한 수로의 상황을 제시하는 것이지, 국경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해도를 근거로 타케시마(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엉뚱한 소리입니다.

한국 

1905년 독도의 시마네현 편입은 일방적인 조치이며 한국은 이 사실을 1906년에서야 알았습니다.

 

일본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1905년 편입 당시 일본은 한국에 공식적으로 타케시마(독도)의 편입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에 한국은 어떠한 불만도 비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후 1907년에 발간된「대한신지지」에서 독도(타케시마)를 그리지 않았습니다.